2009년 8월 26일 수요일

日 언론 "북 매스컴 'MB 반말보도'", 왜?

지난 23일 김대중 전대통령을 조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북한 조문단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직접회담은, 일본 언론에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보수우익으로 분류되는 <요미우리 신문>과 <산케이 신문>은 24일(월) 조간판 1면 탑기사로 양자회담을 다뤘을 정도다. 평상시라면 1면 탑에 걸만한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후 최대의 이벤트라 불리우는 중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기이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도 남지 않은 총선거(30일)를 앞두고 마지막 주말의 선거전을 1면 탑으로 올리지 않고 이웃나라의 양자회담을 탑기사로 다루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이전 기사(日, '정권교체'에 초조해진 "산케이 신문")에서도 밝혔지만 <산케이> 24일자는, 민주당과 자민당의 마니페스토(정권공약)를 비교하면서 "클린턴 방북, 양자회담등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북한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핵 및 미사일 개발에 나선다면, 민주당내 친북세력이 나설 우려가 있다"는 식의, '라면' 기사와 '색깔공세'를 동시에 선보인 바 있다.

 

또 보수의 본가를 자처하는 <요미우리>는 25일자 조간에서, 23일의 양자회담을 다시 한번 다루면서 '북한 매스컴이 이명박 대통령을 부를때 대통령을 빼버리고 이명박으로 일관했다'는 가쉽성 기사를 2면 중앙에 배치했다.
 
외국에서 일어난 이벤트를 이틀연속으로, 그것도 새로운 팩트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배치시킨 <요미우리>의 보도행태는 확실히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요미우리>는 제목도 "북 매스컴, '이명박' 보도 - 호칭 붙이는 것 관뒀나?" 라고 자극적으로 붙였다.
 
신문은 먼저 "북한 미디어는 회담개최를 전할 때 이씨에게 '대통령'이라는 경칭을 붙였지만, 24일부터는 '이명박'이라고만 보도, 경칭을 생략한 비판보도를 내보내는 등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청와대 고관은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2008년까지 10년동안 계속된 좌파정권으로부터의 전환을 상징하는 키워드로서 우리는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 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했다"고 하면서 북한이 남측의 '패러다임 시프트'에 따라오지 못한다는 인상을 줬다.
 
신문은 또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같은 민족이라고 하는 남북관계의 특수한 구도에 갇혀 있어선 안된다" 라고 지적하며 "남북이 보편성과 국제질서에 적합한 관계가 되어야만 남북관계는 한단계 진보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보충설명을 자세하게 실었다.
 
<요미우리>는, '이명박 반말보도' 기사옆에 배치된 금강산 개발관련 기사에서는 "외자로 핵개발 우려"라는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소제목을 달기도 했다.

이런 기사들은 그 자체로만 본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 국내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이 시기에 자극적인 제목 혹은 그 내용으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기사들이 나와, 2면 우측(일본신문은 왼쪽으로 넘기기 때문에 1면 톱기사를 제외하고는 2면 우측이 가장 가독성이 높다)과 중앙이라는 명당자리에 배치된 이유는 뭘까?
 
그리고 이 기사는 북한 매스컴이 왜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취재 프로세스 없이 무작정 '북한 매스컴이 경칭을 생략한 비판보도'를 냈다며, '청와대 관계자의 입장을 성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솔직히 이 기사들만 읽는다면 독자들은 북한이 나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빌 클린턴이 방북하고, 북한 조문단과 이명박 대통령 간의 전격적인 양자회담이 성사되는 등 화해무드가 조성되는 상황을 이들 기사에서는 도무지 확인할 수 없다.
 
원래부터 일본의 보수우익 매스컴의 대북보도가 그래 왔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왜냐면 독자들이 느끼는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감정이 "대북위협에서 우리 일본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는가?"라는 자민당의 주장에 동조되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1천만부를 찍어내는 <요미우리>의 파워를 우습게 봐선 안된다.
 
사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총리를 비롯해 수많은 평론가들이 "엄청난 무언가가 터진다면 몰라도, 이대로 가다간 자민당의 패배는 확실하다"고 말해 왔다. 총선거까지 불과 5일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말하는 '엄청난 무언가'는 물론 북한의 핵미사일이다.
 
그러나 지금 북한 미사일이 일본본토를 향해 날아올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별것 아닌 가쉽성 기사까지 총동원해서 북한을 열심히 때린다. <요미우리>의 언론혼이라고 불렸던 고(故) 구로다 기요시(黒田清)가 살아서 이런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한탄했을까?  
 
<산케이>의 '친북세력' 보도와 <요미우리>의 '이명박 경칭생략' 보도는 일본의 보수언론 수준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후 55년간 지속되어 온 자민당 일당체제에 막을 내릴 이번 중의원 총선거는, 그래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들 보수언론들의 한반도에 대한 짝사랑도 8월 31일부터는 사라지길 기대해 본다.

 

■ 신문 사진을 보시려면 이쪽을 클릭하세요.

[분석] 총선거 국면, 눈에 보이는 일본 보수우익계 일간지들의 보도행태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日 아소 총리 "돈없으면 결혼하지 마!"

<도쿄신문> (8월 23일 인터넷판)에 의하면 23일밤 도쿄에서 개최된 학생주최 이벤트에 참가한 아소 다로 총리가 젊은층의 결혼에 대해
 
"돈이 없으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 돈벌이가 전혀 없다면 (결혼상대로부터) 존경받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고 한다.

신문에 따르면 아소 총리의 이 말은,
 
 "결혼자금을 확보할 수 없는 젊은이가 대부분인데, 결혼이 늦어지는 것이 저출산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참가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고 한다.
 
총리의 답변은, 물론 일정한 생활력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보여지지만, 지금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불황으로 인해 취업난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발언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기사가 인터넷상에 게재되자 "자민당이 왜 망했는지 알 것같다", "돈많은 집 아드님은 역시 다르군요"라는 비꼬는 의견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소총리, 정론입니다", "돈없이 결혼하는 녀석들이 미친 ××들" 등의 아소 총리 발언을 지지하는 의견도 막상막하를 이뤘다.

한편, 아소 총리는 이 발언이 파문을 불러 일으킬 조짐이 보이자,
 
"나는 돈이 없는 게 아니지만 결혼은 늦게 했다. 돈이 있으면 결혼하고, 없으면 결혼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다. 스스로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라서 함부로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고 급히 진화에 나섰다.
 
30일날 있을 중의원 총선거는, 90%이상의 유권자가 관심을 보이고 있어 20대의 투표참여율도 그 어느 때보다 높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아소 총리의 이 발언이 2, 30대 투표율에 영향을 미칠지, 아니면 단순한 해프닝성 발언으로 끝날 것인지 주목받고 있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도쿄에 마련된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조문소 가 보니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한 조문소 및 분향소가 일본각지에 마련됐다.

도쿄의 경우 주일본국한국대사관(이하 '주일대사관')을 비롯해 신주쿠 코리아타운의 재일본한국인연합회(이하 '한인회'), 불교법인 관음사에 서거 다음날인 19일부터 영결식날인 23일까지 마련돼 김대중 전대통령을 기리는 추모객들의 조문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단, 관음사는 불교법인의 특성상 정해진 기한없이 영정사진을 계속 걸어놓을 것으로 보인다.

 

■ 일본에서 본 고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관련기사들


일본 언론이 보도한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일본 지식인들 "DJ는 민주주의의 거목
[현장] 김대중 전대통령이 납치당한 그랜드팔레스 호텔
<도쿄> "DJ는 이념과 권모의 리얼리스트"
<니혼게이자이> DJ 평전"신념, 인내로 뭉친 세계적 지도자"
<마이니치> DJ 평전 "저항하는 사람, 높이 빛났다"
<요미우리> DJ 평전 "일본에 대한 길고 깊은 애증!"
<산케이> DJ 평전 "북 인권에 눈감은 민주화 투사"
<아사히> DJ 평전 "죽음을 몇번이고 뛰어넘은 철인(哲人)"
'아사히'의 "DJ서거 호외"를 입수하다

고이즈미 전총리, 아소 다로 총리도 조문해

먼저 도쿄 미나토구(港区)의 주일대사관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서거 다음날 8월 19일 오전부터 분향소 운영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대사관 1층 접견실 내에 임시로 만들어진 분향소에는 평일인 탓에 찾아오는 사람은 적어 보였다. 하지만 관계자에 따르면 "대사관 주변의 한국기업 주재원이나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분향소를 찾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학생들과 가족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주말이 되면 많은 한국인들이 찾을 것을 예상, 분향소가 운영되는 23일 18시까지는 직원들이 조를 짜 특별 근무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분향소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관답게 많은 외국공관과 일본 정치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분향소에는 현재 고이즈미 전 총리를 비롯, 내각 대신들의 추모행렬은 물론, 21일 오후 8시 30분경에는 아소 다로 총리도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한인회 "코리아타운의 한인들을 위해 만들었다"

오후 5시 20분, 재일코리안이 많이 살고있는 신주쿠 쇼쿠안도오리(職安通り)에 설치된 한인회의 조문소에서는 한인회 간부들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조옥제 한인회 상임고문은 이번 조문소에 대해 "주일대사관에 마련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대사관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추모하고 싶은 분들이 일부러 찾아가서 조문하기 힘들것으로 생각돼, 한인회 사무실에 마련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번 조문소를 마련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온 몸을 바쳐 싸우신 위대한 정치지도자시다. 그분을 그냥 보낸다는 게 이상하고 또 많은 분들이 추모하고 싶을 것이다. 한인회 입장에서 본다면 조문소는 당연한 거다. 서거 다음날 19일부터 23일 영결식까지 많은 분들이 오셔서 자유롭게 조문하셨으면 한다"

또 그는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는 경황이 없어서 조문소 마련등에 미진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한인회 임원진 모두가 힘을 합쳐 매일 서너명씩 조문소를 지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JPNews가 찾아갔을 때 조 상임고문을 비롯해 이효열, 배오성 부회장 그리고 한길수 신주쿠한인발전위원회수석부위원장 등이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19일이후 매일 조문소를 지키고 있다는 한 부위원장은 "19일부터 지금까지 약 70여명의 조문객이 찾아왔다"면서 "일본에 온 한국관광객들, 또 일본인들이 일부러 찾아와 조문을 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본에 온지 일주일되었다는 유학생 김재원(22)씨는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프고 계속 눈물이 나던 차에 여기 조문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며 "남북관계에 대해 마지막까지 염려를 하셨다는 말을 듣고, 김 전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어 꼭 평화통일을 이루어내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관음사 방명록의 사연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분향소를 마련했던 불교법인 관음사도 조촐한 조문소를 마련했다.

관음사 측은 "국가 원수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한 예우라고 생각한다"며 "영정사진을 계속 남겨둘 것이라고, 조문을 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라도 찾아오라"고 말했다.

한편 관음사의 방명록에는 다음과 같은 추모글들이 실려 있었다.

"○○일본어학교 이××다녀갑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하늘에서 두분이서 못다한 얘기 하시길 바랍니다. 고마웠어요"
"△△랭귀지 스쿨 박□□ 다녀갑니다. 이제는 정말 걱정없이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광주시민으로서 김대중 대통령은 희망이고 꿈이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추모하고픈 분들을 위한 연락처 및 주소

주일본국대한민국대사관
장 소 : 주일본국대한민국대사관 1층 접견실 내
주 소 : 東京都港区南麻布1-2-5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 1-2-5)
기 간 : 2009년 8월 19일(수) 10:00부터 8월 23일(일) 18:00

시 간 :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연락처 : (03)3452-7611~9 (내선216, 370)

재일본한국인연합회 사무국
장 소 : 재일본한국인연합회 사무국
주 소 : 東京都新宿区大久保1-12-25 NCビル2F (도쿄도 신주쿠구 오오쿠보 1-12-25 NC빌딩 2층           

기 간 : 2009년 8월 19일(수) 10:00부터 8월 23일(일) 14:00
시 간 : 오전 9시 30분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연락처 : (03) 5287-2671/2

도쿄 신오쿠보 관음사
장 소 : 東京都新宿区歌舞伎町2-41-12 2F 관음사
    (
쇼쿠안도오리 돈키호테 건너편 카부키쵸 우체국 옆건물 2층)
일 시 : 2009년 08월 19일(수) ~
시 간 : 오전 10시~ 오후 10시
연 락 : 03-3200-1013
* 분향하러 오시는 분들께서는 양말/스타킹 등은 착용 부탁드립니다.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아사히신문, DJ서거 '호외'를 발행하다

19일 미니블로그 '트위터'의 지인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는 아마도 한국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호외수집가'인데 그가 보낸 메시지는 "아사히 신문에서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관련 1면짜리 호외를 찍었다는데 확인해 줄 수 없겠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매일 8백만부 이상을 발행하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아사히 신문>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호외를 발행했다는 건 대단한 뉴스다.
 
취재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우선 호외가 발행됐는지 아닌지, <아사히신문> 편집국에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기로 했다.
 
"네. 호외 발행했습니다. 18일 오후, 속보호외 형태로 나갔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역시 '호외수집가'다운 정보력이라며 감탄하면서, "호외를 건네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쓰키치 본사에 가면 되냐?" 물었다. 그러자 호외를 담당하는 사람이 "아! 호외는 호외인데 그런 일반적 호외가 아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아사히신문>은 두 종류의 호외를 낸다. 하나가 아주 큰 사건이 터졌을 경우, 신문형태로 인쇄해 긴자, 신주쿠등에서 뿌리는 호외이고 또하나는 인쇄를 하는 게 아니라 A4사이즈의 PDF화일로 만들어 <아사히신문> 배달소 및 판매점에 메일로 보내는 호외가 있다. 이번 김대중 전대통령의 사거(死去)는 후자의 형태다"
 
또 이 관계자는 "후자의 경우 물론 호외에 걸맞는 큰 사건, 뉴스를 다루긴 하지만, 1년에 200건 정도를 만드니까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보기 힘든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사히신문>이 호외를 냈다는 건 사실이라고 하니 어떻게 하던 입수를 하고 싶어, 먼저 아사히신문 ASA 다카다노바바 판매점을 찾았다. 점원은 한동안 기자의 설명을 들은 후 "무슨 말인지 소장님이 안계셔서 잘 모르겠고, 당신네들 주소라면 와세다대학점이 관할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와세다대학 판매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상황을 보아하니 본사에서 PDF 화일로 내려온 속보호외를 일부러 프린팅해서 알리거나 하지 않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왔다.
 
그 자리에서 <아사히신문> 편집국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점원에게 바꾸었다. 한동안 둘의 대화가 지속되더니 전화를 끊고난 점원이 기자에게 "스미마셍(미안하다)"을 연발하면서 "석간신문배달시에 꼭 출력해서 가지고 가겠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오후 5시.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 들어간 A4 사이즈의 용지에 인쇄된, 속보호외 3장이 배달되어 왔다. 호외는 환하게 웃고 있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사진, 그리고 "김대중씨 사거(金大中氏 死去)"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속칭 '친한파'로 분류되는 하코다 데쓰야 서울특파원이 작성한 속보호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김대중씨 사거 - 한국 전대통령 남북회담 실현
 
[서울 - 하코다 데쓰야]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남북한의 화해 및 교류, 한일관계개선에 온몸을 바친 김대중 전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울시내의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85세였다. 6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의 리더로 군사정권에 저항해, 73년에는 도쿄에서 납치됐지만, 97년에 4번째의 도전끝에 대통령에 당선. 역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키는 등 격동의 생애를 보냈다.
 
재임중에는 '대화'를 기조로 북한의 체질변화를 꾀하는 '햇볕(포용)정책"을 펼쳐 00년 6월 한국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북, 평양에서 김정일 총서기와 회담해,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했다. 00년 12월에는 민주화운동과 남북화해의 공헌이 평가받아 한국으로서 처음으로 노벨상(평화상)을 수상했다.
 
대일관계에 있어서도 대통령 자격으로는 98년 10월 처음으로 방일. 고(故) 오부치 게이조 수상과의 한일수뇌회담에서 "한일 파트너쉽 선언"을 내놓아, 과거 역사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미래를 중시하는 '미래지향'을 호소했다.
 
03년 2월 퇴임후 인공투석을 받으면서도 강연, 자서전의 출판준비를 진행시켜 왔다. 하지만 올해 7월 상태가 악화돼 줄곧 입원을 하고 있었다. (끝)
 
속보호외는 낸 아사히신문은 물론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이곳 일본언론에서도 엄청난 뉴스로 취급되고 있다. 8월 18일은 일본 정가에 있어 전후 최대의 분수령이 될 중의원 총선거(8월 30일 투개표)의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신문들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중의원 총선거보다 비슷하게 혹은 더 크게 보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등이 3개 지면을 들여 타국의 지도자를 다루는 것을 한번도 본 적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부분의 일본언론들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 어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제외하고 본다면 김대중 전대통령은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의지를 지닌 민주투사이자, 위대한 정치가이며 세계적인 평화, 인권주의자"로 다뤄졌다.(<산케이신문> 제외)
 
중립을 추구하며, 칭찬에 인색한 쿨(Cool)한 일본 언론의 특성을 염두에 둘 때 이 정도의 극찬은 아마도 더이상 나오지 않을까 한다.

 

■ 일본언론이 다룬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관련 기사
일본 언론이 보도한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일본 지식인들 "DJ는 민주주의의 거목
[현장] 김대중 전대통령이 납치당한 그랜드팔레스 호텔
<도쿄> "DJ는 이념과 권모의 리얼리스트"
<니혼게이자이> DJ 평전"신념, 인내로 뭉친 세계적 지도자"
<마이니치> DJ 평전 "저항하는 사람, 높이 빛났다"
<요미우리> DJ 평전 "일본에 대한 길고 깊은 애증!"
<산케이> DJ 평전 "북 인권에 눈감은 민주화 투사"
<아사히> DJ 평전 "죽음을 몇번이고 뛰어넘은 철인(哲人)"
'아사히'의 "DJ서거 호외"를 입수하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일본 지식인들이 바라본 김대중 전대통령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일본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김 전대통령은 한국의 그 어느 인물보다도 일본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월터 크롱카이트로 불렸던 언론인 고(故) 치쿠시 테츠야는, 2005년 5월 23일 김 전대통령의 도쿄대 야스다 강당 강연회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은 전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 영원히 남아있는 거목"이라며 90도로 허리숙여 깊이 인사한 바 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등 수많은 정치가들을 인터뷰하고 또 공격한 대쪽 저널리스트 치쿠시 테츠야가, 공적인 자리에서 어떤 정치인에게 90도 인사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 서점의 고(故) 야스에 료스케 사장은, 73년 8월 8일 '김대중납치사건'이 일어나던 그때 당시 월간지 <세계>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우연찮게 납치 그날 발간된 <세계>  9월호에는 야스에가 중심이 되어 진행한 민주인사 김대중 선생의 인터뷰가 칼럼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다.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납치됐다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리고, 그들도 호텔로 달려오긴 했는데, 다들 김대중 대통령을 모르는 거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세계>에 인터뷰가 실린게 생각나서 그걸 복사해서 일본 기자들에게 뿌렸지"


이 칼럼이 바로 김대중 전대통령의 이름을 일본사회에 알린 "한국민주화의 길"이다.

이후 야스에씨는 "내 편집자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물론 김대중 선생이시다"라고 공언했다. 또 <세계>는 '김대중납치사건'을 인권유린과 주권침해라 규정하고, 이후 지속적인 시리즈 기사를 게재했다.

80년대 들어 신군부 정권하에서 내란음모죄 등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일본에서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하 '한민통')을 중심으로 한 재일동포와 일본의 지식인, 시민단체, 노동조합들이 '김대중구출운동'을 전개했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일본의 시민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당시 일본 최대의 노동조합 연합체였던 '총평'을 이끌던 마키에다 의장은, 2006년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과거를 회고하며 "김대중 구출운동을 통해 조직의 힘이 다져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고 말했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그래서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직접 전화를 걸어 그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 나가누마 세쓰오(저널리스트동맹 대표, 전 지지통신 기자, 71년부터 김대중 전대통령을 취재함)

"우선 너무나 아쉽다. 정말로 위대한 분이 돌아가셨다.

많은 일본인들은 1973년 8월의 납치사건때부터 김대중 선생에 관심을 가지게 됐지만, 나는 71년 대통령 선거때 한국을 건너가 서울 옥수 초등학교에서 김대중 후보의 엄청난 연설을 직접 육성으로 들었다. 한국어를 거의 몰랐던 내게도 그 연설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흡입력을 가졌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절망해도 절망해선 안된다'는 말은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세리프다. 또 그가 일본 자민당의 아시아 아프리카 의원연맹의 초대를 받아 왔을때 스스럼없이 '일본의 정치가중에 자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철학적인 신념으로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라고 일성을 토해낸 것은 지금도 기억속에 남아있다."  

■ 곽동의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공동위원장, 한통련 상임고문. 80년대 김대중 구출운동의 선봉에 섬)

"나라의 손실이자 국민의 슬픔이다. 건강하게 퇴원하시길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는데, 끝내 이렇게 돼버려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김 전대통령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고, 행동하는 양심이셨다. 그 암흑의 시절에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신 분이다.

지금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이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선배들이 피를 흘렸고, 또 그 맨앞에 김대중 전대통령이 계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김대중 전대통령은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가져온 위인이셨다. 몸이 안좋으셨으니 이런 날이 조만간 올 줄을 알았지만, 속으로는 건강하게 일어나셔서 지금 안좋은 동북아시아 상황을 어떻게 좀 해 주십사라는 기대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므로 김 전대통령의 서거는 역설적으로 그가 남긴 유지를 살아있는 우리들이 받들어야 한다.

생전에 워싱턴과 도쿄에서 한번씩, 나중에 한국에 가서 3번째로 뵈었다. 그때 동교동 자택에서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조그만 그릇에 나누어서 주는 일본의 풍습과 달리 커다란 생선 한마리를 놓고, 김 전대통령과 젓가락질을 하는데 어찌나 황송스럽던지. 몸둘 바를 몰랐다.

김 전대통령이 남긴 과제를 우리 모두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아오키 오사무 (저널리스트, 전 교도통신 서울특파원, 2006년 겨울 김 전대통령과 단독인터뷰)

"쇼크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도 충격이었지만,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평화주의자를, 우리는 지금 잃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흔히 김대중 전대통령을 남북관계를 진전시킨 지도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감추어진 업적중 하나로 '한일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들고 싶다. 김 전대통령 시절 일본의 대중문화가 개방됐고, 한일관계가 가장 좋았다.

김 전대통령은 차원이 다른 정치가셨고, 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의 메모리로 남을 것이다."

(끝)

DJ가 납치당한 일본 호텔 직접 가보니...
일본언론도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소식 속보로 다뤄

2009년 8월 17일 월요일

일본 최대게시판 2채널, 한국 네티즌 공격에 다운?

일본 최대의 익명게시판 웹사이트 "2채널"이 8월 15일부터 분산형서비스방해(DDoS) 공격을 받기 시작해 17일 정오 현재까지 뉴스속보 게시판, 예능 게시판등 일부 서버가 다운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IT MEDIA>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2채널이 15일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해 16일 새벽 다운되어 35시간이 지난 17일 정오까지 일부게시판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17일 현재 접속이 원활하지 못한 서버는 뉴스속포와 스포츠, 연예등의 게시판을 관리하고 있는 'yutori7'라는 이름의 서버다. (IT MEDIA는 'yurori7'라고 보도했지만, 뉴스속보판 관리는  'yutori(유토리)7' 서버가 맞다. '유토리'는 '유연함, 융통성' 등을 의미한다)

 

해당게시판의 관리운영자는 "IP등을 볼 때 한국쪽의 사이버 공격으로 보인다"며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해 16일 오전 1시 완전한 기동불능상태에 빠졌다"는 공지를 올렸다.

 

일본 최대게시판 2채널, 한국 네티즌 공격에 다운?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일본 대지진, 전문가들은 '괜찮다'하지만 글쎄?

지난 11일과 12일, 비슷한 새벽시간대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틀 연속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시간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새벽의 지진만큼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1995년 1월 17일에 발생해 약 5만여명의 사상자(사망자 6,433명, 부상자 43,792명)를 낸 전후 최대의 재난 고베대지진은, 매그니튜드(Magnitude, 이하 'M') 7.9의 강진이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새벽(5시 46분)에 발생하는 바람에 엄청난 피해를 냈다.
 
특히 12일 지진은 언젠가는 다가올 대지진 '도카이 지진'을 연상케할 정도였다. 도카이 지진의 진앙발생지에 들어가는 시즈오카현이라는 점, 그리고 간토(관동)지역에서는 드문 M6.5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도카이 지진(東海地震).
 
1970년대부터 "지금 이순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왔던, M8이상이 예상되는 대지진이다. 도카이 지진은 684년부터 지금까지 약 100년에서 150년주기로 발생해 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진학계에서 도카이 지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498년 M8.6을 기록한 기이(紀伊)반도 지진이다. 지금의 와카야마현과 시즈오카현 일대에서 일어난 이 '기이'지진은, 최초의 도카이 지진으로 기록되면서 사망자 3만 6천명을 냈다...

 

일본 대지진, 전문가들은 '괜찮다'지만...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마쯔리, 여자들만의 '미코시' 행진

"우리 마쯔리(祭り, 각 지역의 전통을 살려 매년 진행되는 일본의 여름축제)는 간토 최고의 축제야!"
 
8월 첫째주 주말이 되면 평소 한산하던 도쿄 서쪽의 하치오지 거리가 열기와 흥분에 휩싸인다. 2003년 지역전통예능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유명한 여름축제 '하치오지 마쯔리(八王子祭り)'가 열리기 때문이다.
 
매년 8월 첫주 금토일에 열리는 하치오지 마쯔리는 간토(관동) 지역 유수의 마쯔리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하치오지 마쯔리는 '다시(山車), 사자춤이 특징인데 '다시'는 마쯔리의 주인공인 '미코시(神輿, 신령이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를 인도하거나 엄호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하치오지 마쯔리에 등장하는 '다시'는 보통 다른데서 보는 것들과 차원이 다른 거대함을 자랑한다. 직경 1.5미터의 나무바퀴과 4, 5미터에 이르는 높이는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는 데 충분하다.
 
하치오지 마쯔리는 동서남북 4개지역을 대표하는 거대한 4대의 '다시'들이 하치오지 거리를 순행(巡行)하는, 이른바 "다시쥰코우・미코시신요(山車巡行・神輿御輿)"을 통해 지역의 안녕과 평화, 안전을 기원한다.
 
이 외에도 1천명의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행하는 '봉오도리(盆踊り, 춘분/추분등 계절이 나누어지는 시기에 추는 춤)' 대회,  민요 및 사자춤 대회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또 일본 마쯔리의 단골손님인 닭꼬치(야키도리), 야키소바등 먹거리를 파는 간이가게들도 300여점포이상 세워져 구경꾼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마쯔리를 매년 기획하고 있는 하치오지 마쯔리 실행위원회의 다무라 요시오 씨는 JPNews의 취재에 "간토지역 최대의 마쯔리라고 자부한다"면서 "매년 30만 이상의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9일 오후 이틀동안 하치오지 시내에 머물렀던 하치오지 각 지역의 신령들이 하치오지 하치만야구모(八幡八雲) 신사로 들어가는 행진을 가졌다. 남녀가 어울려 '미코시'를 둘러메고 '영차! 어영차!!" 소리를 지르며 조금씩 조금씩 움직인다.
 
하치오지의 10여개 지역을 알리는 특색있는 '미코시'가 순서대로 행진을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왔던 건 역시 여성들로만 구성된 '미코시' 행진이다. 야히메카이(八姫会)라는 자치회의 '미코시'로 '히메(姫)'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이 직접 미코시를 둘러메고 남자들은 주변에서 "힘내라"는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얼굴에선 땀이 비오듯 한다. 하지만 힘들어지면 다른 이들과 교체해 가며 300여미터를 완주하는 그녀들의 얼굴표정은 한없이 밝다.
 
2009년 8월, 뜨거웠던 하치오지 마쯔리 현장으로 가보자.

 

마쯔리 사진을 보려면 클릭!



 

2009년 8월 11일 화요일

어머니가 건담 프라모델 감추었다고 집에 불지른 29세 청년

최근 도쿄 오다이바에 18미터짜리 실물 건담 모형이 만들어지는등 지난 30년간 지속적인 인기를 누려온 일본의 국민적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을 둘러싼 방화사건이 일본의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IT Media의 <ZAKZAK>는 8월 11일 "건담 프라모델을 어머니가 버렸다는 데 격분해 집에 불지른 20대 청년 체포"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에 따르면 효고현 가사이시에 거주하는, 29세의 남자 회사원이 자기집을 방화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경찰관계자는 용의자가 집을 방화한 이유에 대해 "어머니가 건담 프라모델(이하 '건프라')을 버렸다고 착각해서 화가 나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일본에 '건프라' 매니아가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플라스틱 장난감을, 그것도 '버렸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한데 자기도 살고 있는 집을 불태워 전소시킬 줄이야...

 

日 건담 프라모델 버렸다고 집에 불질러?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야스쿠니 촛불행동, "합사 반대!"를 외치는 이유

"부당한 합사를 반대한다!"
 
올해로 네번째를 맞이하는 "평화의 등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 촛불행동"(이하 '촛불행동') 행사가 7일과 8일, 양일간에 걸쳐 도쿄일대에서 개최되었다.
 
7일 국제심포지엄에 이어, 8일에는 도쿄 우에노 공원내의 야외음악당에서 약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2009 동아시아에서 야스쿠니를 본다 - 콘서트 및 증언"이 열렸다.
 
촛불행동은 2006년 8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총리대신의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를 계기로 결성된 단체로, 한국과 중국, 대만, 일본의 시민단체, 유족협회등이 참가해 매년 8월 도쿄일대에서 행사를 벌이고 있다.

 

1시 30분 우에노 공원에 도착한 JPNews 기자들을 반긴 이는 약 300여명의 일본경찰과 기동대 차량이었다. 회장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시청 공안부 소속의 경찰관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어온다. 취재차 왔다고 말하니, 명함을 보여달라고 한다. 명함을 보여주면서 "왜 이리 삼엄하냐"고 물었다.
 
"작년에 충돌이 있어서 그럽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작년(08년) 집회를 마친 '촛불행동'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가졌을때, 일본우익단체들이 "조선인, 지나인(중국인)은 자기 나라로 꺼져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에 계란, 페트병을 던지면서 뒤엉킨 적이 있었다. 다른 공안부 관계자는 "올해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끔 다른 시위때보다 2배 이상의 병력이 충원된 것"이라 말했다.
 
8일 행사는 14시부터 18시 30분까지 야외음악당에서 콘서트 및 증언, 그리고 19시부터 촛불시위 가두행진으로 잡혀져 있었다. 장장 4시간 30분의 콘서트다. 처음엔 차질없이 진행될지 의문도 들었지만, 등장인물 면면은 꽤 화려하다.
 
반전평화 가수 이쿠다 만지, 오키나와의 서정을 전하는 '고토부키', 전국민의 애창곡 '바위섬'의 김원중, 이제는 촛불문화제의 단골가수가 되어버린 손병휘, "겨울연가"를 통해 일본에도 이름이 알려진 권해효를 비롯해 대만원주민족 타이알족의 집단가무와 최근 반(反)빈곤 비정규직 집회에 단골손님으로 출연하는 '겟토노하나 가무단'이 등장한다.
 
또한 한국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66) 대표를 비롯해 일본측 유족, 대만 타이알족 징용자 유족대표등 태평양전쟁 전사자들의 유족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취소를 요구하는 '증언'(유족들의 입장발표)을 가진다. 무대뿐만 아니다.

야외음악당 입구의 빈터에는, 한국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한중일 3국의 공영을 기리는 의미에서 '아시아 평화와 연대'라는 제목의 대형 걸개그림을 그리고 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전통옷을 입은 3국의 청소년들이 약 20여명정도가 그림속에 등장해 한중일의 언어로 '친구야 안녕!','만나고 싶었어', '평화', '전쟁반대'등을 외치는 그림이다.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림을 그리고 있던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부천지부의 윤국재 지부장은 기자에게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는 결국 아시아 전체의 문제이고 특히 한중일 3국이 같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라면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그 문제해결은 물론 전쟁없는 아시아의 평화와 연대를 기리자는 의미에서 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과 다음 내용을 보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야스쿠니 촛불행동, "합사 반대!"를 외치는 이유

 


 

2009년 8월 8일 토요일

일본 재판원제도 스타트, 하지만...?

"검사구형 16년, 재판원판결 15년"
 
일본 사법제도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재판원 제도에 의한 형사재판이 8월 3일부터 6일까지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렸다.
 
대상 형사재판은 도쿄 스기나미구에서 일어난 살인죄 사건으로 72세 피고인의 형량과 재판원으로 뽑힌 시민재판원들의 발언 및 그 일거수일투족은 4일내내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4일간의 공방끝에 피고인은 당초 검찰측 구형량이었던 16년보다 1년 적은 15년을 선고받았다. 징역 15년이 확정되자, 피고측 변호인들은 "이건 아닌데"라는 표정으로 항소할 뜻을 밝혔고, 피해자측 유가족들도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족들은 징역 20년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다른 판례에서 이런 류의 살인사건의 경우 최종적으로 10~12년 정도의 형량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16년 구형에 15년 판결'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이번 판결을 두고 "재판원 제도가 별탈없이 성공적으로 치루어 졌다"며 자화자찬하는 일본의 거대 언론들과는 달리 앞으로 일본의 재판원 제도가 이른바 보수적으로 흐르지 않을까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재판원 제도는 1999년 7월 27일부터 2001년 7월까지 만2년간 내각부에 설치된 "사법제도개혁심의회"에서 처음으로 거론됐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우정민영화, 연금개혁등 각종 제도 및 시스템 개혁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사법제도개혁 역시 총리가 관장하는 내각부에서 주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사법제도개혁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는 "재판원이 참가하는 형사재판에 관한 법률안"(이하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 2004년 5월 21일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법안은 통과로부터 5년후 실시된다는 조건을 붙이고 있었으므로 2009년 5월 21일부터 재판원 제도는 법률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재판원 제도는 자민당부터 공산당까지 여야 대다수가 기본적으로 찬성했고, 일본의 주류언론들 "국민의 사법참가가 가능해지면서 사법에 대한 국민의 이해증진과 신뢰도가 향상될 것"이라며 이구동성으로 재판원 제도의 도입을 찬성했다.  

법률안 역시 재판원 제도의 시행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및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당분간 재판원 제도가 적용되는 사건을 지방재판소에서 벌어지는 제1심의 형사재판 중 살인, 상해치사, 강도치사, 건조물방화, 금품목적 유괴사건등 중대한 형사범죄에만 적용키로 했다.
 
추진본부는 재판원의 인정에 의해 좌우될지도 모르는 세간의 의혹을 불식하고 피고인의 인권을 충분히 고려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재판원 제도의 적용을 제1심 형사재판으로 한정했다. 또한 재판원으로 뽑힌 일반인들의 심적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재판원 및 그 친족에 피해가 갈지 모르는 사건은 재판관만으로 재판을 진행한다"라는 예외조항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현행 재판원제도의 문제점은 끊임없이 지적되고 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재판원 제도 반대 목소리

 

<주간현대>, <주간 프라이데이>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재판방청 매거진'의 책임편집자였던 모토키 마사히코는 JPNews의 취재에 "(재판원 제도에 관한 법률안은) 위헌투성이"라며 "앞으로 사법당국이 마음먹은 대로 굴러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일본의 사법제도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일본의 형사재판은 법정에서 역전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유명무실하며 검찰에 기소된 그 순간 99.9%의 확률로 유죄가 결정된다. 유죄율 99.9%.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봐서도 그 유례가 드물다. 그래서 일본 매스컴은 용의자가 기소되는 순간 아무개라고 소개했던 것을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다.
 
모토키는 "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일반시민들이 검찰이 유죄입증을 위해 준비한 수많은 조서 및 자료들을 보고 무죄나 반론을 제시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면서 "바둑에서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강조한다.
 
재판원 제도가 시작되면서 사법당국이 강조했던 장점들, 이른바 취조의 가시화, 증거의 전면적 제시등은 하나의 수단일 뿐 일본인의 국민성을 볼 때 법의 프로가 이미 정합적인 능력을 띤 시나리오를 제시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주체적 사고로 이견을 낸다는 건 힘들다는 말이다.  
 
모토키는 또 "무엇보다 재판원 제도는 헌법에서 보장한 사상 및 표현의 자유를 현저하게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현행 재판원 제도가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의 사퇴를 용인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즉 사형반대론자나 사람이 사람을 권력적으로 억압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상을 가진 이라도 재판원에 뽑히면 무조건 출석해야 한다.
 
법률안은 재판원 후보자 결격사유에 대해, 법률안 14조에서 17조까지 명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 의무교육을 받지 않은 자, ▲ 금고이상의 형을 받은 전과자, ▲ 일정 지위의 공무원 및 법률관계자, 경찰관, ▲ 사건에 관련하는 불적격사유(피고인, 피해자의 관계자 및 해당사건 관여자등), ▲ 70세 이상, 학생 등으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무작위로 뽑힌 재판원은 위 사항에 해당되지 않을 경우, 재판원 제도에 참가해야 하는데 이때 위 사항에 해당된다고 거짓말을 할 경우 법률안 110조 '허위의 사실 기재'에 따라 50만엔 이하의 벌금형, 또는 30만엔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하며, 정당한 이유없이 출석하지 않은 자는 법율안 112조에 의해 10만엔 이상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즉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사상의 자유가 이번 법률안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물론 재판소는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8배수에서 10배수의 후보자를 뽑아 치밀한 면접 및 질문을 거쳐 재판원 6명 및 보결재판원 3명을 두는 보완제도를 채택했지만, 법률안 자체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보다 큰 문제는 해당 재판에 참가한 재판원의 '비밀엄수 의무'다. 법률안 108조는 비밀엄수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재판원은 평의(評議)의 경과나 각각의 재판관, 재판원의 의견이나 그 다소의 수(평의의 비밀엄수라고 함), 그 외 '직무상 얻게된 비밀'을 발설해서는 안된다. 이 의무는 재판종료후 생애에 걸쳐 적용된다. 재판원이 평의의 비밀이나 직무상 얻게된 비밀을 발설할 경우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50만엔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다만 공판중의 경과에 따라 방청인도 얻게된 사실에 대해서는 발설해도 된다"
 
이 말은 재판정 안에서 다른 방청인 및 매스컴이 알게된, 이른바 공공의 정보에 대해선 말해도 되지만 재판과정, 즉 증거자료, 수사기록, 피해자・가해자의 인적사항 등에 관해서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배치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때 도쿄고등재판소 총괄판사까지 역임한 오오쿠보 다로 역시 5월중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5월 21일부터 적용된 재판원 제도에 관한 법률안은 헌법상 근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오오쿠보의 지론은 다음과 같다.
 
"재판원 제도는 이른바 일본이 취하고 있는 3심제의 하나로 적용되어야 할 것인데, 문제는 일본의 사법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6장 '사법'에 올해부터 시행되는 재판원 제도와 같은 배심원 제도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재판원 제도의 규정이 없으므로 당연히 법률안의 세부적 조항도 성립되지 않는다. 즉 이 나라의 헌법은 법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재판원 제도를 용인하고 있지 않다"
 
오오쿠보에 따르면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해당하는 최고재판소 역시 재판원 제도의 평결권에 대해 헌법적 견해에 따라 의문을 품고 있다고 한다. 즉 헌법상 재판원 제도 도입의 근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평결권이 없는 일반시민이 사법권한을 가진다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기존 매스컴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다.
 
8월 3일부터 6일까지 일본의 종합일간지 및 지상파 방송국의 뉴스코너는 "사상 최초의 재판원 제도(요미우리)", "알기 쉬운 법률용어로 풀어(아사히)", "재판원이기에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질문(마이니치)"등으로 채워졌다. 위에서 지적하고 있는 재판원 문제의 본질을 추구한 거대 일간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냈으며 최근 재판원제도를 비롯한 일본의 사법제도를 철저하게 파헤친 <교수형>(고단샤)을 상재한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는 JPNews와의 전화통화에서 "전체적으로 일본 매스컴의 저널리즘적 질이 저하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선 신문기자들의 심층취재 능력, 본질을 파헤치는 취재자세의 결여가 아쉽다. 또 문제투성이인 이번 제도는 기본적으로 '시민참가형'이라는 그 형식때문에 진보와 보수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는 측면이 크다.
 
일본의 사법제도가 가져왔던 밀폐적 태도를 시민이 참가함으로 바꿀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이 진보진영에서도 나오고 있고, 보수진영에서도 재판원 제도의 도입을 꺼려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일단 그 흐름을 지켜보자는 보도행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배심원 제도와 달리 일본의 재판원 제도의 근본적 모순을 지적하면서 반대의 뜻을 명확히 밝혔다.
 
아오키는 "배심원 제도는 사법제도가 국가권력을 대변한 것을 시민이 판단을 내린다는 시민사회적 가치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지만, 일본의 재판원 제도는 재판원이 재판관들과 동석한다는, 즉 권력을 감시하는 게 아니라 권력이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출발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그는 "진정한 시민의 공정한 참가, 시민사회의 양식을 위한다면 살인사건등 감정에 의해 좌우되기 쉬운 재판보다 국가권력의 오용, 정치인의 비리등 시민사회의 상식적 감시가 필요한 재판에 이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일본의 재판원 제도, 하지만 그 앞날이 그렇게 순탄할 것 같지만은 않다.


2009년 8월 5일 수요일

일본 언론이 바라본 클린턴의 방북

미국의 빌 클린턴 전대통령의 전격 북한방문으로 억류되어 있던 미국인 여기자 2명이 풀려났다. 이 소식은 8월 5일자 일본 종합 일간지의 톱기사로 다루어지는등 일본 매스컴에서도 큰 뉴스로 다루어졌다.
 
8월 4일 아침부터 클린턴의 일거수 일투족을 구체적으로 보도해 가던 일본 언론들은 8월 5일 두 여기자의 동행석방(특별사면)이 실현되자 석간신문 1면 톱기사(8월 5일자)로 이번 방북과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이번 클린턴의 전격방문을 "미국의 발빠른 공격적 외교"라고 평했다.
 
<요미우리>는 먼저 클린턴의 체재시간에 주목했다. 신문은 클린턴이 북한에 머문 시간이 24시간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미국은 어디까지나 북에 억류당해 있던 여성기자들의 석방이 (방북의) 최대 목적으로, 핵문제는 북미'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북한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그간 핵실험과 장거리유도탄 발사등 강경전술을 펴왔음에도 불구하고 미 전대통령의 방문을 받았고,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특별사면'라는 형식으로 클린턴이 여기자들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은전'을 베풀었다.
 
또한 끊임없는 건강악화설에 시달리고 있던 김 위원장을 대중 앞에 나타나게 해 김정일 체제의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것도 효과가 컸다고 본 것이다.
 
<도쿄신문> 역시 8월 5일자 석간 톱기사로 "북한이 미국인 기자를 은사(恩赦)했다"는 기사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북한을 조이고 있던 제재포위망을 견제하는 양자회담"이라고 규정하면서 "북미융화무드를 연출함으로 국제사회가 결속하기 시작하고 있던 경제제재의 포위망을 견제함과 동시에 국내외적으로는 체제의 안정을 자랑하는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실제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의 8월 5일자 "보도발표"를 통해 "미국의 클린턴 전대통령이 두명의 미국인 기자가 공화국(북한)의 실정법을 어긴 것에 대해 깊이 사죄했으며 클린턴씨는 버락 오바마 미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고 밝혔다. 미국측은 "이번 클린턴씨의 방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언급한 것에 비한다면 온도차가 꽤 있다.
 
한편, <도쿄신문>은 "일본과 한국의 경계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북미대화가 재개되어 비핵화교섭이 진전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간 경제제재에 힘을 써왔던 일본과 한국은 이런 식의 안이한 양보에 철저한 경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마이니치 신문>은 미 정부 관계자의 입을 빌려 "이번 석방건은 핵문제와 철저히 분리시켜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이니치>는 로이터 통신을 인용해 "미 정부당국자는 이번 방북과 핵문제는 따로 놓고 생각한다는 것이 북미간의 사전약속이었고, 이에 따라 클린턴씨의 전격방문은 사적인 방문으로 봐야 한다"고 보도했다.
 
또한 신문은 클린턴을 보좌한 방북멤버에 주목했다. 클린턴씨의 측근인사로 구성된 이번 방북멤버들 중에는 근무처에 정식 여름휴가를 신청한 후 방북행에 오른 이도 있을 정도로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이가 존 포데스터다. <조선중앙통신>이 국내외에 배포한 아래 사진에서 뒤쪽 왼쪽에서 세번째에 자리잡은 민주당계 싱크탱크 <아메리카 진보센터>의 최고 책임자 존 포데스터는 클린턴 정권 시절 수석보좌관을 맡았고, 오바마 대통령의 정권이행팀(인수위)의 공동의장을 맡은 민주당 최고권위의 싱크탱크다.
 
또한 오른쪽 뒷줄 두번째는 06년까지 약 30년간 미 국무성에 근무한 관료로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는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다.

 

오바마 대통령 인수위의 공동의장을 지낸 이와 30년간 정권의 부침과는 상관없이 북한 핵문제 실무를 다뤄온 관료가 클린턴과 함께 방북을 했다. 클린턴의 이번 방북이 단순한 "여기자 구출을 위한 인도적 행위"로만 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멤버구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아사히 신문>은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발표 요지문을 실어 눈길을 끌었다. 또 클린턴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며 김정일 총서기나 북한 핵문제 등이 아닌 클린턴에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해 나갔다.
 
신문은 ABC뉴스, CNN의 인터뷰, 로이터 통신등 복수 언론사의 기사를 인용해 "이번 클린턴의 방북은 앨 고어의 요청에 따른 것", "북한이 클린턴을 지명했다", "클린턴의 방북 의미는 크다", "팀 클린턴이 재결성됐다"는 식의 수식어로 빌 클린턴이 화려한 복귀식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번 클린턴의 방북에 대해, 5일 오전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이 정례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을 말했다.
 
가와무라 씨는 "이번 방북에 대해서는 높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두명의 미국인 여기자가 풀려난 것을 환영한다"고 간단하게 언급했다. 또 이번 방북에 대해 미국측에서 사전연락이 있었다는 점도 공식적으로 밝혔다. (본문일부 경칭 생략)

 

일본 언론이 바라본 클린턴의 방북

'새역모' 역사교과서 채택, 그 배후에는?

지난 4월 9일 일본 문부과학성 교과서 심의검정을 통과한 지유샤(自由社)판 우익교과서 '중학 역사교과서'가 8월 4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지유샤판 역사교과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 회장 후지오카 노부카쓰)'의 주류세력이 후소샤와 결별한 후 만든 역사교과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임나일본부설, '이씨조선' 표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식민지화 등 기존 새역모의 주장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의 후소샤판이라면 몰라도 2009년 지유샤판 역사교과서가 각급 교육위원회에 채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이것은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면 지유샤판 교과서는 2005년 이후 후소샤와 결별한 새역모 주류가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출판한 것이지 채택될 것이라는 기대 자체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지오카 회장이 이끄는 새역모 주류는 2005년 후소샤와 결별하고 지유샤로 말을 갈아타면서 조직적 역량이 상당히 축소되었다. 새역모가 분리된 이유는 후소샤의 모기업 후지산케이 그룹이 전폭적인 후원을 했던 이른바 '후소샤판 역사 및 공민 교과서'의 채택률이 0.39%에 그쳤기 때문이다.
 
당시 새역모 중진이었던 야기 히데쓰구 교육재생기구 이사장 및 <후지TV>의 히에다 히사시 회장은 이 결과에 엄청난 실망과 함께 "교과서 내용이 너무 과격해서 그렇다"며 새역모와 결별을 시도했다.
 
문제는 결별이후 새역모가 후소샤판 교과서를 다른 출판사에서 내려고 했을 때 불거졌다. 야기 및 후소샤는 복수 저작권 권리를 들고 나왔다. 새역모 교과서 내용은 여러 사람이 집필한 것이기 때문에 전원허가를 받지 않는 한 출판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지금도 새역모는 복수 저작권 문제로 후소샤 쪽의 '교과서 개선을 위한 모임(이하 '교개모', 회장 야기 히데쓰구)과 법정분쟁을 진행하고 있다. (하략)

 

일 새역모 교과서 채택,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2009년 8월 3일 월요일

생활정치 VS 성장전략, 日 유권자들의 선택은?

중의원 총선거를 한달 앞둔 7월 31일, 자민당이 '성장전략'과 '책임'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마니페스토(manifesto, 이하 '정권공약')를 발표했다.

 

정권교체를 노리는 민주당은 4일 빠른 7월 27일 '생활중시', '탈관료'를 중심으로 한 정권공약을 발표한 바 있다.

 

자민당의 '성장전략'과 민주당의 '생활중시'는 역대 그 어느 총선보다 명확하고 알고 쉬워, 유권자의 한표 행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은 7월 31일 오후 5시 당본부에서 정권공약 발표회를 가졌다.

 

자민당 총재 아소 다로 총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책임력'을, 먼저 언급했다. 책임감이 아니라 책임력, 즉 '책임을 질 수 있는 역량'이다. 정권공약 발표시기만 본다면 민주당에 선수를 내준 자민당이었지만, 후수의 묘미를 살려 '민주당은 과연 일본을 책임질 수 있는가'라고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정권공약에는 실현가능한 '근거제시'와 '일관성'이 필요하다. 자민당은 이것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또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른 정당과 다른 점이 바로 이 '책임력'이다. 우리 공약은 '마이너스는 플러스로, 플러스는 더욱 플러스로!' 이다" (7월 31일, 정권공약 발표회, 아소 다로 총리)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한 민주당이 출산, 육아, 교육, 연금등 개개인의 복지대책에 방점을 찍었다면, 자민당은 지속적인 성장을 강조했다.

 

자민당의 정권공약집에는 "2010년도부터 본격적인 경기회복을 통해 경제성장율 2%를 실현해 나가겠다"면서 '중(中)복지・중부담'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어 놓았다.

 

아소 총리는 "재원확보 근거조차 없는 '고(高)복지'가 아니라, 개개인의 적당한 부담을 통한 현실적인 복지정책, 즉  '중(中)복지・중부담'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이고 책임있는 정책"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당연히 민주당의 복지정책을 경계한 말이다.

 

'생활중시'를 내세운 민주당의 복지정책은 자민당이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내용이다.

 

민주당은 '임신부터 사망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플로어차트로 보고 구체적인 복지정책을 만들었다. 출산시 55만엔(한화 670만원)의 일시금을,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중학교 졸업시까지 매월 2만 6천엔(한화 35만원)을 받게 된다. 또한 고교에 들어가서도 수업료 지원 명목으로 매년 12만엔~24만엔을 지급받게 된다(공립고등학교는 수업료 면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연금제도도 일원화시켜 월7만엔의 최저보장연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부족한 의사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의학부 학생을 1.5배 늘리는 제도개혁을 단행하기로 했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중소기업의 법인세율을 현행 18%에서 11%로 내리고, 최저시급 1000엔 정책, 그리고 제조업의 파견(비정규직) 제도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 모든 정책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지출된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는 가정하에 계산하면, 2010년도 7.1조엔, 2011년 12.6조엔, 2012년 13.2조엔, 2013년 16.8조엔의 추가지출이 생겨난다. 말이 16.8조엔이지 일본의 1년 총예산이 207조엔임을 감안한다면 약 8%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게다가 민주당은 소비세 인상 논의를 집권 4년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소비세 인상없이 4년간 총액 49.7조엔을 어디서 끌어올 수 있을까?

 

자민당은 결국 이 추가지출의 재원마련의 근거를 제대로 대지 못하는 민주당을 "책임력이 없다"라고 비판하면서 국민들의 적당한 부담과 적당한 복지(중복지, 중부담)가 현실적인 책임감있는 정책이라고 논박하고 있는 셈이다.

 

8월 1일자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한 자민당 정권공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 2011년도까지 소비세를 포함한 세제발본개혁에 필요한 법제상의 조치를 취해 경제상황이 회복기에 들어섰을 때 지체없이 실시.

-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전 3년간의 어린이 교육비의 부담을 단계적으로 경감시켜 12년후에는 전면 무상화.

- 2010년도 후반에 연2%의 경제성장을 실현. 앞으로 10년후 가정의 가처분소득을 100만엔 늘림.

- 3년간 40~60조엔의 수요를 창출해 약 200만명의 고용을 확보함.

- 2020년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을 세계 톱클래스로 끌어올림.

- 도주제(道州制)기본법을 빠른 시일내에 제정해 제정후 6~8년이 지나 도주제를 도입.

- 미국을 향하는 북한의 탄도미사일의 요격이나 미사일 방위에 연계한 미국 군함의 방호등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필요한 안전보장상의 조치를 취함.

 

민주당이 예산을 투입해야만 하는 정권공약의 경우 명확한 수치를 제시한 것에 비해 자민당은 ▲ 2010년도 후반 연2%의 경제성장, ▲ 2020년까지 가처분 소득 100만엔 증가, ▲ 200만명의 고용확보, ▲ 2020년 1인당 국민소득 세계 톱클래스 등의 선언이 주를 이룬다. 민주당의 '생활중시'와는 확연히 다른 '성장중시'의 아젠다가 묻어 나온다.

 

아소 총리는 31일 정권공약 발표회에서도 '경기회복', 곧 '성장중시'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저는 지금까지 '경기최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정책을 실행해 왔습니다. 왜냐면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국민의 생활도 안심할 수 없고 다양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재원도 나오기 않기 때문입니다. 6개월간 4번의 보정예산편성을 실시한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소기업이나 지방의 지원, 정액급부금, 고속도로 통행료 휴일 1000엔 정책, 에코포인트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주가는 7,050엔에서 1만엔대로 회복했습니다"(7월 31일, 정권공약 발표회, 아소 다로 총리)

 

하지만 자민당의 정권공약은 몇가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시사종합주간지 <주간 아사히>의 야마구치 가즈오미 편집장은 <저널(The Journal)>에서 운영하는 자신의 블로그 "엉망진창 편집장 일기"를 통해 아소 총리의 주가를 예로 든 경기회복을 강하게 비판했다.

 

"닛케이 평균지수가 아소 다로 수상의 '중의원 해산 선언'이 있었던 7월 13일부터 연일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그래프로 보면 V자 회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줄 정도다. 하지만 이걸 두고 자민당의 경제대책이 먹혔다고 생각하는 건 커다란 착각이다.

 

오히려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감 섞인 고공행진이라고 보는게 맞다. 경제전문가들은 민주당 정권탄생으로 인해 경기가 극적으로 좋아지진 않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GDP도 올라갈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마켓은 이미 정권교체, 8월 3일자 포스팅)

 

야마구치 편집장은 "실제로 증권회사는 이미 '추천! 민주당 종목주'를 고객들에게 배부하고 있으며, 메릴린치는 아주 세부적으로 나누었다"면서, 아소 내각의 경기활성 대책으로 7천엔에서 1만엔까지 올렸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주간 아사히> 8월 14일자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한 민주당의 육아관련 정책을 본 외국인 투자자가 "이정도 금액을 지원한다면 정말 출생율이 올라갈 것 같다, 이런 대담무쌍하고 용기있는 정책을 재원이 어딨냐는 식으로 공격하는 일본인들은 정말 꿈이 없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자민당의 이번 정권공약이 일반유권자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위 '정권공약의 골자'을 보면 자민당의 주요정권공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기간은 대부분 10년으로 중의원 임기 4년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이에 비해 민주당은 2011년도부터 2014년까지 4년으로 한정시켰다. 임기가 4년인데 10년을 내다보는 정권공약을 유권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소 총리는 이번 총선거를 "정책선택 선거"라고 규정했다. 민주당의 '허무맹랑한 생활중시'인지, 아니면 자기네들의 '책임있는 성장전략'인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말이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편해졌다. 90년대 이후 총선거의 접점은 소선구제, 신(神)의 나라, 정권공약, 우정민영화 등으로 사실 일반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 힘든 것들이 테마였다. 그랬던 것이 이번엔 '생활 VS 성장'으로 정착됐다.

 

전후(戦後) 일본에 있어, 어쩌면 가장 뜨거울지도 모르는 8월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결과는 8월 30일 나온다.

2009년 8월 1일 토요일

주일대사관 김현중 총영사가 보내온 글

올해로 7번째를 맞이하는 <2009재외동포차세대무역스쿨>(이하 '무역스쿨')이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도쿄 재일본한국YMCA에서 개최된다.

 

사단법인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도쿄지회(회장 진영섭)가 매년 여름 개최하는 무역스쿨은 매년 100여명의 재일동포 2,3세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여러 세미나를 통해 네트워크를 늘려가는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금년의 주제는 "위기에서 벗어나는 국제비즈니스 전략"으로, 주일본대한민국대사관의 김현중 총영사를 비롯해 일본 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수많은 기업관계자들도 참여해 청년동포들에게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음은 김현중 총영사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JPNews 독자들도 공유했으면 좋겠다"면서 보내온 <2009재외동포차세대무역스쿨>의 요약・발췌문이다.

 

제7기 재외동포차세대무역스쿨 2009를 맞이하여 - 주일대사관 김현중 총영사